서로에 대한 호기심을 채우는 시간 그리고 성장배경을 이해하는 시간이 나름 특별했던 것은 맞지만 도미닉과 있으면서 항상 좋았던 것은 아니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만난 정말 별로인 남자 중에 한 명이 도미닉이다. 나도 그 당시에 그다지 좋은 상대는 아니었기 때문에 뭐라고 할 위치에 있지는 않지만 비슷한 수준의 두 사람이 만난 것 같다.
최악의 싸움 중 첫 번째는 '에이즈 검사 사건'(이름만 들어도 참 자극적이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하다. 나는 틴더를 통해 매우 액티브한 성생활을 즐기고 있었고 내 틴더 스토리에 포함되지 않은 만남이 짧은 남자들도 있었다. 별로 인상깊지도 않고 잠자리만 가지고 내쪽에서 연락을 끊었기 때문에 풀어낼 이야기도 따로 없다. 나는 도미닉에게 이런 얘기를 했었고 이 얘기는 이미 도미닉과 만남을 시작할 때부터 했던 이야기다. 그런데 어느 날 잠자리를 갖고 도미닉 몸에 내 혈흔이 묻어나자(월경 시작) 갑자기 이런 얘기를 꺼내는 것. 에이즈 검사를 받아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아니, 항상 잠자리에 가장 먼저 열성적이었으면서 갑자기 이런 스탠스를 취하는 것이 정말 당황스러웠다. 그 당시 나는 '이번 기회에 확실히 검사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라는 생각에 일단은 '알겠다'고는 했지만, 검사를 받고 생각해보니(결과 음성)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뭔가 괘씸하고 불쾌했다. 나와 잠자리를 하면서 피임조차 철저히 안 하곤 했으면서 갑자기 나에게 화살을 돌리는 느낌이 매우 기분이 나빴다. (사실 멕시코 사람들과 비교하면 대체적으로 유럽 사람들이 피임을 확실히 잘 안 하는 듯. 내 계인적인 통계...그리고 주변 통계) 그래서 그에게 "너도 평소 피임기구 잘 안 쓰는 것 같은데 피차일반이다. (난 적어도 콘돔은 철저히 씀) 너도 검사하고 와."라고 했고 여러 번의 언쟁 끝에 도미닉도 검사를 하러 갔다.
아마 이때부터가 아닐까 싶다. 관계가 삐그덕 대며 도미닉의 검소함이나 유능함이, 이제는 계산적여 보이고 자기만의 논리에 가득 찬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던 때가... 콘돔을 사도 돈을 꼭 반반씩 내려고 하는 것, 우리 집까지 버스 타고(버스가 저렴) 와서 아침마다 내가 부른 우버를 같이 타고 가는 것, 굳이 아들 보러 오는 휴가에 숙소비 아끼려고 대학 강의를 하고 숙소를 제공받는 것, 내가 없는 휴가 쪼개서 독일로 오면 자기가 숙식제공을 하겠다는 것(숙식은 결국 자기 집에서 먹고 자고 가끔씩 외식, 비행기 값은 내 몫). 나도 웬만하면 데이트비 반반 연애를 추구하지만 이건 뭐 연애에서 절대 손해 안 보겠다는 느낌이랄까...(나만 그렇게 느끼는 걸까?) 게다가 들어보니 전 여자 친구를 독일로 초대했을 때는 비행기 값에 여행비까지 모두 본인이 냈다고 하니 '뭐, 이런 놈이 있나...' 싶었다. 전 여자 친구에게 데이고 와서 절대로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다짐에서 달라진 것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그 사실을 몰랐다면 모를까 그의 과거를 아는 상태에서 그의 행동을 보니 정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런 돈문제로도 기분이 상했었다.
그리고 한번은 카우치서핑 사람들과 다 같이 폭포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사람 수가 많은 만큼 우여곡절이 많았고 시끌벅적했는데, 일정을 잘 소화하고 대체적으로 재밌는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그때 도미닉이 우리와 함께 온 한 여성 멤버를 가리키며 외모 칭찬을 하는 것. 나는 이에 자존심이 상해 이를 싸우는 상황까지 끌고 갔다. 솔직히 이 경우엔 내 잘못도 있다. 지금의 나라면 함께 동조해주고 가볍게 넘겼을 텐데. 그때의 나는 자존감도 낮고 워낙 콤플렉스도 많았어서 '자존심이 상하는 일' 혹은 '내가 옆에 있는데 어떻게 다른 여자를 보고 그런 말을 하지?'라고 받아들였던 것 같다. 솔직히 지금은 내 데이트 상대가 그런 말을 하고 있으면 매력이 반감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때처럼 불같이 화내거나 엄청 속상해하진 않을 것 같다.
도미닉과 거의 마지막을 장식한 사건은 바로 '독일 취업 프로젝트'. 도미닉이 독일로 돌아간 후 장거리 연애에 대해 확답을 주진 못했지만 도미닉이 원하는대로 일단은 독일 취업을 도전해 보겠다고 말했고, 그때 도미닉이 옆에서 많이 도와줬었다. (사이트, 이력서 수정 등) 하지만 그 당시의 나는 매우 수동적인 인간이었어서 도와주는 사람이 90을 하고 나는 10의 노력으로 조력자를 거둘 뿐이라는 생각에 갇혀있었다.(이상한 마인드) 그리고 당연히 멕시코에 있는 사람을 취직시켜줄 회사는 없었다. (개발자도 아니고 일반 사무직에 독일어도 못하는 사람이기에...) 나 딴애는 큰 마음먹고 시도했는데 좋은 결과가 없어서 애꿎은 도미닉만 탓했고, 멕시코의 산루이스 포토시에 있는 포지션에 지원해 보겠다는 도미닉의 제안도 반기지 않았다. 어차피 그것도 장거리고, 난 멕시코에서 계속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에 멕시코까지 오겠다는 도미닉의 제안이 탐탁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 둘 사이엔 답답하고 부정적인 메시지만 오고가기 시작했고 사귀는 사이가 아니기 때문에 나는 다른 틴더남을 만나기 시작했고(그 안에 곤살로도 포함) 도미닉은 그 사실에 충격을 받아 예전에 사귀었던 일본인 전 여자 친구와 다시 사귀기 시작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인데도 불구하고 그 당시 나는 도미닉의 결정에 큰 충격과 상처를 받았다. 아마 그때는 다른 틴더남과는 캐주얼한 관계이고 도미닉과는 그보다 더 특별한 사이니 계속해서 지속될 수 있는 관계라고 착각했던 것 같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이 관계를 공식적으로 끝내게 되었다.
+) 번외
멕시코를 영영 떠날 생각에 짐정리를 하던 때에 도미닉에게 연락을 받았다. 멕시코에 출장차 오게 되어 볼 수 있는 마지막 날이었다. 나도 멕시코 전국 일주 계획이어서 정말 간발의 차로 만남을 가졌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당시 나는 독일로 떠날 계획을 하고 있었기에 도미닉도 내 계획을 듣고 꽤나 놀란 눈치였지만 그는 이미 스위스로 사업을 옮기는 때였고 같은 유럽 땅에 함께 있어도 우리 사이엔 여전히 물리적인 거리가 존재했다. 그는 예전처럼 많은 대화를 이어갔고 자연스럽게 그가 머무는 숙소까지 갔지만 그때 몸상태가 좋지 않아 잠자리를 갖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이런 기운이 맴도는 건 그도 나에게 여전히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에 일본인 여자 친구와는 어떻게 되었냐고 하니... 계속 사귀고 있다고... 허허 역시 우리는 서로에게 '똥차'였던 관계가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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